죄는 강한 데서 싹트고 구원은 약한 데서 비롯됩니다!(요엘 2,23-3,5)
도대체 죄(Schuld)는 무엇일까요?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법학적으로 여러 학문적 개념으로 규명하려고 해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부정적인 마음과 행위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약하면 스스로에게 가해(加害)하지만 강하면 타자에게 위해(危害)를 가합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Geist; geist)과도 연관이 됩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을 때에 자신 안에 감춰진 또 다른 이름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약하기 때문에 안에 있는 부정적인 정신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힘과 정신을 주겠다고 합니다. 유약하다고 생각하는 그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발생합니다.
삶이란 아무것도 아닌 이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유약한 듯하지만 영원한 이름과 정신 속에 사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삶의 구원은 거만한 이름을 제거하고 꺾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삶의 절대적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을 없애는 작업들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져야 합니다. 권력, 돈(자본), 명예, 자녀, 지식 등의 이름들은 자신을 강하게 내보여줍니다. 실제로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영원한 정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름에서 어떤 영원불변한 진리와 정신을 볼 수 없습니다. 강한 것은 죽은 것과 연관되고, 약한 것은 산 것과 연관됩니다. 지금까지 강하다고 이름을 붙인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인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약한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약한 것이야말로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하늘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아래 있지 않고 위에 있는 것은 약함을 통하여 사람들을 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약한 것이 위에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위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고 살았다면 이상도 꿈도 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신이 저 위에 있으니 그 이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하느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지만, 그분은 자신의 절대적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품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썩지 않는 것처럼 각각의 사람들의 이름과 삶의 이름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이름은 밝히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른 이름들의 포로는 될지언정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의 이름을 호명할 때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딱딱하고 신앙의 유연성을 잃어버리면 그 안에 하느님의 이름이 각인되지 않습니다. 이미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안에 ‘부드러움’이라는 개념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하고 힘이 없으며 아무 쓸데가 없다는 생각, 그래서 함부로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작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강한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어서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자세, 혹은 방어적 자세를 취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의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나아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정신과 희망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서로 강하다고 싸우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을까요?
삶은 처음부터 유약하게 생성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과 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한 가운데서 서성이지 맙시다. 사람들 한 가운데서도 멈칫거리지도 맙시다. 내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유약한 이름을 찾아 함께 더불어 삶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 합니다. 그 발걸음마다 하느님의 이름이 피어날 테니까 말입니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입니다.
김대식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기장교회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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