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던 아들 비유 – 루가 15:1-3,11하-32 어린 시절 탕자에 관한 설교를 기억하면 목회자들은 늘 ‘신앙적 회심’을 주로 다뤘다. 한국교회가 한창 성장의 길을 달릴 때, 집 나간 아들은 교회로 돌아와야 하는 탕자로 해석했다. 전도 활동 강조와 새로운 교인을 각성시키는 내용이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헌신적인 교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의 회심과 귀환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비유는 차츰 ‘윤리적 회심’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게 되었다. 탕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받아 향락에 빠진 타락한 아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아버지가 매일 저녁 마을 어귀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기다린다는 거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처지가 빈궁해지면서 문득 쾌락의 허망함과..
기다림의 은혜 – 루가 13:1-9 본문에서 어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에 있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를 3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무 중에서 무화과나무는 수세가 좋아서 참 잘 자라고 열매도 잘 맺습니다. 그런 나무가 열매를 3년이나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이 쓸모없는 나무를 베어버려라.” 말합니다. 마치 루가복음 13장 5절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듯 …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돌보던 포도원지기는 주인과 생각이 다릅니다. 13:8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
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 루가 13:31-35. 이신효 스테파노 사제(부산주교좌교회)
2025.03.20
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 루가 13:31-35 ‘나’가 무너지는 경험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입니다. 마치 이것은 조그마한 퍼즐 조각으로 겨우겨우 완성된 그림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릴 때 느끼는 허망함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과거’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온갖 풍파에도 기어이 그리고 애써서 맞춰 놓은 나의 퍼즐 작품을 지키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진리’, ‘변함없음’, ‘선’, ‘정상’, ‘신념’으로 둔갑합니다. 아쉽지만, 이러한 생각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시간이 말해준 것을 ‘확신’하고 의존하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애써 지키고..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사순절 모습. 저항하라! -루가 4:1-3, 원성희 아모스 사제(서귀포 교회)
2025.03.13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사순절 모습. 저항하라! – 루가 4:1-3 루가복음 4장 1절 이하 말씀은 예수님의 사순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유혹에 저항하는 예수님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힘은 자신의 결심, 자신의 의지, 자신의 절제와 극기도 중요한 모습입니다만, 예수님에게는 우선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서 말씀만으로 악마를 물리칩니다. 오늘 악마의 유혹(財貨, 명예, 권력)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유혹입니다. 빵(財貨)에 대한 유혹도, 명예에 대한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
겸손한 성찰과 참 자유 – 루가 6:39-49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며 백성을 억압하는 이들을 비유로 경고하십니다. 그 경고의 대상은, 하느님의 은총이어야 할 율법을 사람들을 옭아매는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도구로 삼아 타인의 삶을 억압하며, 수많은 영혼을 자유가 아닌 고통과 눈물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율법 실천의 표준인 양 당당하게 살아가며,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의 눈과 귀와 마음이 닫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런 이들에게서 어떤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
원수 갚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웬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루가 6:27-38, 이재탁 요한 사제(대구교회)
2025.02.21
원수 갚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웬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 루가 6:27-3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다.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는 높은 차원의 이웃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세상을 이겨내고 승리하는데 그 길은 믿음에 있다. (1요한5:3-5). 구세주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로 오셔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 믿음의 자녀에게 근본을 새롭게 해주셨고, 성령의 도움으로(2디모1:7) 숭고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죄와 허물이 용서받았다는 인식이 회개와 믿음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의 격으로 긍휼히 여..
사냥꾼의 자유에 맞서기 – 루가 6:17-26 말과 사슴이 싸움을 벌였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 사슴에게 복수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사냥꾼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정말로 복수하고 싶거든 내가 고삐로 널 조종할 수 있도록 입에 마구를 채우고, 사슴을 쫓는 동안 내가 편히 앉도록 등 위에 안장을 얹어야 해.” 말은 기꺼이 동의했다. 결국 말은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사슴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말은 사냥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요. 입과 등에 채운 것도 풀어주세요.” 하지만 사냥꾼의 대답은 이랬다. “이봐,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이제 막 마구를 채웠잖아.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단 말이야.” - 이솝 우화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사냥꾼은 말에게 적당한 조건을 내겁니다. “..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십니까? – 마르 6:53-56 소위 ‘보는 눈’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에서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다느니, 앞으로 어떤 직종이 유망할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는 정보는 성공이나 유명세,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부르는 ‘인플루언서’라는 말도 새로 생겼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믿고 따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금방 유행이 되고, 굉장히 공신력 있는 정보가 됩니다. 그런데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는, 좋지 않은 정보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여과 없이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로 어느 정도 유명세를 얻고 나면 이런 일..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 - 루가 2:22-40, 박준헌 미가 사제(마산교회 보좌사제)
2025.01.31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 - 루가 2:22-40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두 인물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고 또 한 사람은 안나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며 오래 기도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신다는 이야기를 선포했고, 안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기쁨으로 알렸습니다. 시므온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선포했고, 안나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이 둘은 힘을 합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리는 사람..
절대 어둠 속 저편에서 불어오는 소리-루가4:14-21, 김대식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서대구 교회)
2025.01.31
절대 어둠 속 저편에서 불어오는 소리 -루가4:14-21 하나의 성스러운 문자가 소리로 울려 퍼질 때, 절대 어둠 속에 바람(πνεῦμα)이 일었습니다. 잊혔던 옛날 기억들을 소생/소환시키고, 정결과 정화와 각성과 순수를 가능케 하는 문자는 사람들의 피부로 전해집니다. 실체가 보이고 그 실체의 그림자는 문자가 소리가 될 때마다 춤을 춥니다. 문자는 그냥 문자가 아닙니다. 구원의 사전입니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날 때, 까마득한 자국으로만 남아 있을 때, 문자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사전 찾기는 구원이 됩니다. 어둠이라고 포기하려고 할 때, 사전 속 언어는 구원처럼 나의 기억을 새롭게 상기시켜줍니다. 옛날 언어가 귀환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싶을까마는, 언어가 도래하는 그 시공간은 하나의 언어적 사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 요한2:1-1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물로써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첫 기적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일이오!”(요한 2장 10절) 사람들은 놀라 감탄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잔칫집의 분위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술이 없다고 잔치가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흥겨움이 사그라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 술은 있어야 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가나의 혼인잔치는 우리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술이 떨어진 잔칫집은 기쁨을 잃어버린 신앙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쁨 없는 신앙생활은 믿는 이의 삶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가 기쁨을 향한 노력인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루가3:15-17,21-22(박용성 바르나바 사제(서대구 교회))
2025.01.1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3:15-17,21-2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고귀하고 정결하고 값비싼 것이어서, 일상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한해 한번은 찾아가야 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순례 경비 또한 버거웠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번제물의 비용 또한 무거웠고, 만나서 하느님 말씀을 듣기에 제사장은 너무 먼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요르단강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나와 회개받을 수 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산과 계곡을 흘러 내려와 갈릴리 호수가 되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되어 흘러가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가고, 아이들은 수영을 하는 그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 요르단강 세례자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