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기준 - 마르 6:1-13 내 키는 얼마나 될까? 나의 재능은 얼만큼일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름할 때 그것이 어느정도인지 잦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표현한다. 길이, 넓이, 크기 등도 그렇지만 잘하느냐, 잘생겼냐, 부자냐와 같은 것도 어느정도의 기준이 정해질 때 그것을 가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정해지게 된다.판단기준이 정해지면 그것을 토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판단기준이 명확하지 않을때는 오히려 그 값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예수님이 고향에서 병자 몇사람에게 손을 엊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를 보고 이미 경험한 고향 사람들의 판단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오직 믿음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으로... - 마르 5:21-43, 원성희 아모스 사제(서귀포교회)
2024.07.01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마르코5:21-43).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며 힘겨운 삶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힘겨운 시선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지만 그 고통은 여전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늘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례 여인에게는, "여인아, 네 믿음이(피스티스πίστις, faith)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코5:34). 두 번째 사례에서도 주님은 축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피스튜에πίστευε, believe) 하여라(마르코5:36)". 주님은 얼마 전, 거센 바람과 어둠 풍랑..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마르 4:35-41(이재탁 요한 사제(대구교회))
2024.06.24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마르 4:35-41 하느님 자녀의 인생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 배를 타고 우주라는 바다를, 인생이라는 바다를 둥둥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따라서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광풍 노도가 덮칠 위험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을 만나 구세주 예수님이 함께 배 안에 있음에도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비와 구원의 때이니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2고린6:1,2,11)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도 겁이 많으냐?”,“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듯이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한숨 소리가 기도 소리가 되지 못하느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는데(마태27:..
유일한 희망 – 마르 4:26-34 희망적인 소식을 듣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 경제적 어려움, 세계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무력 충돌, 전 지구적으로 휘몰아치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이상 징후가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득세로 부유함이 삶의 질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사회임에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깔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쥐어짜 타인에게 ‘있어 보이는’ 삶을 전시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우울과 불행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너진 개인은 생존을 위해 ..
논리성의 오류, 제 다리에 걸리지 않기 – 마르 3:20-35 토론이나 논쟁의 경험이 있으신지요? 논쟁과 토론에서는 ‘경청’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다른 측면은 ‘나의 주장이 더욱 타당하다는 점, 반대편이 나보다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정중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설득력은 “상대보다 얼마나 더 논리적이냐?”뿐 아니라 “상대가 자기 주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논쟁태도는 곱씹을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사무엘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겠습니다!”라는 그들의 주..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새로”, “다시”라는 단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거나 혹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실천은 오늘 말씀 말미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를 믿고 따르는 인간은 구원의 길로 가며, 이 여정 안에서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결국,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함께” 항상 새롭게 거듭날 것이며, 이를 통해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하나임을 드러낼 것을 생각해봅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일구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구원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일 수도 있..
교회의 생일 - 요한 15:26-27, 16:4하-15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되심과 하늘로 올리우심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 자체와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손이며,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주님의 발입니다. 바울로가 말했듯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아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뵙고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작은 공동체의 신앙 운동이 이제는 약 2천년 긴 시간을 뛰어넘고 산과 바다를 넘어 세상에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출발점은 언제일까요? 바로 성령님께서 임하..
떠난 이의 뒷모습엔 이름이라는 사랑이 - 요한 17:6-19,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2024.05.10
떠난 이의 뒷모습엔 이름이라는 사랑이 - 요한 17:6-19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정현우, “사랑의 뒷면”,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신앙의 빈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맴돌아 이름이 주었던 실제의 말들이 생각나 말들이 퍼지고 그 말들이 입술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뒷면의 문이 열려 말이 새어나와 신앙의 이..
예수님 안에 머물라 – 요한 15:1~8 예수님 안에 머물러 주님과 일치를 살아가는 사람은 애덕(愛德)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시고 그 가지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라고 밭을 일구고, 모진 바람을 보내시어 나뭇가지들을 다듬어 죽은 가지들을 손질하고 잘라서 밖에 버립니다. 농부가 가지치기를 할 때 가지가 잘린 곳에서 나무는 잘린 곳이 낫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웁니다. 나무는 손질해 주어야 하고, 가지치기해주어야만 탐스럽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무에게 가지치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고, 가지는 잘려 나가 밖에 버려지고 말라버립니다.부실한 가지와 쓸모없는 가지들을 치는 작업은 새로운 가지와 새싹을 준비하..
원초적 복음 - 사도 4:32-35 "인간의 무지함과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라는 중의적 정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부여됐습니다. 이것이 “원초적 복”음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것을 알리고 증언하는 자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 뒤에 자신들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교회 제도와 전통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고 그 권위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도화되기 이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 "원초적 복음" 뒤로 자신들을 가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해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사람들이 그 기적에 집중하거나, 사람인 제..
우리는 참 평화를 원한다! 감사성찬례 예배 순서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은 ‘평화의 인사’ 때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본 후,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겸손하게 손을 내밀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일입니다. 평화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자기 내면에 갈등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질서나 경제가 공평하게 실현된 상황도 평화가 흐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환호하던 군중과 제자에게 배반당하셨고 불의한 재판을 받고 돌아가셨지만, 그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제자에게 수난과 부활 예고도 있었지만, 다 잊어버리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기만 한 그곳, 그들에게 참 평화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 휩싸여 어찌할 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
부활 속의 공현 알렐루야! 우리교구 위에 부활의 환호성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 현실성은 증인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고린토교회에 사도 바울로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타나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신 고린토전서 15장, 오늘 전례독서 본문에는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셨다(보이셨다)’는 단어가 6번이나 반복해서 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리차원에서 믿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생생한 사건이며 실재입니다. 초대교회들, 고린토교회, 고르넬리오 가정교회에서 중요한 것,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