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복음 - 사도 4:32-35
"인간의 무지함과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라는 중의적 정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부여됐습니다. 이것이 “원초적 복”음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것을 알리고 증언하는 자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 뒤에 자신들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교회 제도와 전통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고 그 권위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도화되기 이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 "원초적 복음" 뒤로 자신들을 가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해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사람들이 그 기적에 집중하거나, 사람인 제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 (사도 3:12)
만약 제자들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기적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아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실증적인 것에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보다 보여진 것,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반신 장애인이 걷는 기적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을 보고 또 사람들이 제자들이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듯 그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그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인데 제자들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욕구가 제자들에게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에 집중하길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보이지 않는 복음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믿음은 실증적인 것이나,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분명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믿음으로 더 집중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부활3주일 설교문 중에서 일부 발췌)
- 채창완 야고보 사제(제주우정교회)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난 이의 뒷모습엔 이름이라는 사랑이 - 요한 17:6-19,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0) | 2024.05.10 |
---|---|
예수님 안에 머물라 - (요한 15:1~8) 김성완 분도사제(거제교회) (0) | 2024.04.30 |
우리는 참 평화를 원한다! - 유용숙 안나프란시스 수녀사제(구미교회) (0) | 2024.04.06 |
부활 속의 공현 - 교구장 부활대축일 서신 중 (1) | 2024.03.29 |
고난주간에 드리는 기도 (0) | 2024.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