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의 뒷모습엔 이름이라는 사랑이 - 요한 17:6-19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정현우, “사랑의 뒷면”,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신앙의 빈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맴돌아 이름이 주었던 실제의 말들이 생각나 말들이 퍼지고 그 말들이 입술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뒷면의 문이 열려 말이 새어나와 신앙의 이면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입가에서 끈적거리며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뒷면,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젠가 떠오를지 모르는 안쪽, 속알맹이와도 같은 말들일 뿐입니다. 감정과 행위는 뒷면 혹은 뒷모습을 보이면 회의와 의심 속으로 사라지지만 말들은 살아납니다. 그것이 사랑이 갖는 진정한 이면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말로서 다가와서 말을 맡기고 떠납니다. 하느님이 말 자신이기 때문에 말을 맡은 이는 하느님을 대신합니다. 하느님의 말을 이행하는 자가 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로서 뒷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것이 말씀이라는 실체입니다. 말로서 다가올 때는 감히 그 말을 똑바로 대하지 못합니다. 다만 떠나는 뒷모습 속에서 그 말씀의 실제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뒷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말을 맡긴 예수 안에서 신의 말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은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말을 정면에서, 앞면에서 직접 듣는 일은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니, 그것을 직접적으로 담지했던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앞면, 하느님의 안쪽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하는 이는 이제 더 이상 저편에서 말하는 이를 뒷모습에 대해서만 말하는 이가 아닙니다. 비록 떠나갔고 저편에서 이편을 향하더라도, 말을 위임받은 이는 말을 함으로써 이편이 아닌 저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과 저편의 동일성은 말을 하는 이와 저편에서의 삶의 세계에서 살아감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말은 그냥 말이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거룩한 말입니다. 저편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거룩한 삶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 거룩한 말을 사용할 때 다시 사랑은 곱씹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실증이 되고, 말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사랑이 확인됩니다.
거룩함이 탈색된 세계에서 말은 다시 거룩한 색을 되찾게 할 것입니다. 뒷모습 때문에 질려버렸다는 사람들에게, 그 뒷모습이 외려 남겨진 말로 입혀진 저편의 색깔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여기 없더라도 사방에 남겨진 이면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뒷모습, 사랑의 뒷면은 제발 나중에 생각하라고.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고 견고한 입술에서는 거룩한 문장들을 밀어냅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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