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희망 – 마르 4:26-34
희망적인 소식을 듣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 경제적 어려움, 세계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무력 충돌, 전 지구적으로 휘몰아치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이상 징후가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득세로 부유함이 삶의 질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사회임에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깔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쥐어짜 타인에게 ‘있어 보이는’ 삶을 전시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우울과 불행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너진 개인은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어 이웃을 신경 쓸 겨를도, 공동체를 만들 여유도 갖지 못합니다. 이런 사회적 불안정함은 지방 소멸, 인구 감소와 같은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이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희미해 보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는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화려하고 웅장하게, 하루아침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겨자씨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리며 그것이 어떻게 자라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농부는 그 씨앗이 자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씨앗을 뿌립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이 자랄 것이라는 소망을 포기하여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럽지만, 우리는 이곳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우리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무일과 아침기도의 소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니,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으리이다.’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우리가 소망을 품고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뿌리는 씨앗을 키우시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온 우주의 근원이시며 샘솟는 희망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황윤하 라파엘 부제(동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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