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성의 오류, 제 다리에 걸리지 않기 – 마르 3:20-35
토론이나 논쟁의 경험이 있으신지요? 논쟁과 토론에서는 ‘경청’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다른 측면은 ‘나의 주장이 더욱 타당하다는 점, 반대편이 나보다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정중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설득력은 “상대보다 얼마나 더 논리적이냐?”뿐 아니라 “상대가 자기 주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논쟁태도는 곱씹을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사무엘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겠습니다!”라는 그들의 주장에 야훼는 사무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그리되면 너희의 자유는 빼앗길 것이다.” 야훼의 말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그것 쯤은 상관없소!”라며 논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요. 이스라엘의 마지막은 우리가 잘 압니다. 왕조는 분열했고, 제국에게 처참하게 멸망했지요.
예수가 바알제불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예루살렘 율법학자들은 수도 출신에 걸맞게 다른 지방 율법학자들보다 더욱 단단한 논리로 예수를 옥죄어 옵니다. 예수의 기적에 놀라 자빠지는 군중들에게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는 논리를 펴지요. 당시 ‘바알제불’의 굴레는 우리 사회의 ‘종북’, ‘빨갱이’ 이미지처럼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중요한 논리 하나를 놓쳤습니다. 그것을 예수는 “악마의 힘을 악마가 대적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예수를 악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기적을 인정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예수의 기적이 악마의 것이라고만 주장했지, 그의 기적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성에 함몰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논리’를 자신하며 나의 승리와 상대의 손해를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제 풀에 자빠지고 제 다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렇게 자유인에서 계급사회로 종속되었고, 예수를 바알제불이라 굴레를 씌우려던 율법학자들은 부끄럽게 되었지요.
내가 한 말과 행위에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교회가, 우리 사회가 그런 책임있는 말과 행동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 이신효 스테파노 부제(주교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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