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던 아들 비유 – 루가 15:1-3,11하-32
어린 시절 탕자에 관한 설교를 기억하면 목회자들은 늘 ‘신앙적 회심’을 주로 다뤘다. 한국교회가 한창 성장의 길을 달릴 때, 집 나간 아들은 교회로 돌아와야 하는 탕자로 해석했다. 전도 활동 강조와 새로운 교인을 각성시키는 내용이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헌신적인 교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의 회심과 귀환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비유는 차츰 ‘윤리적 회심’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게 되었다. 탕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받아 향락에 빠진 타락한 아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아버지가 매일 저녁 마을 어귀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기다린다는 거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처지가 빈궁해지면서 문득 쾌락의 허망함과 아버지께 지은 죄를 깨닫는다. 관대한 아버지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귀환은 착한 아들로 거듭나는 ‘윤리적 회심’의 순간이었다. 기독교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윤리적 존재임을 설교했다.
‘신앙적 회심’에서 ‘윤리적 회심’으로 안내하는 사목 활동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볼 수 있다. 우리의 앎은 상황 안에서 맥락적인 의미가 있는 한계적 지식이다. 하지만 정보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성향에 맞는 정보를 계속 취득하면서 고정관념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굳건해졌다.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에서 비롯된 인지적 편향 중에서 대표적인 확증 편향이 작동하는 거다. 이제 우리의 임의적 앎은 불변의 진리로 변해서 고착되었다.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심리적 속성이지만 성찰의 기회를 잃어 스스로 진리가 된 것이다.
우리는 맥락적이고 임의적 앎을 성찰할 기회를 놓쳐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채 우상이 되었다. 질문과 회의(懷疑)를 거부하는 우상은 동일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법이다. 다양한 정보와 삶으로 이뤄진 현대는 합리성을 갖춘 시대인 듯하나 인식적 편향으로 가득한 인간은 합리성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를 놀라게 한 “계몽령”이라는 말은 성찰을 잃은 작금의 인지 부조화를 상징한다.
성찰은 자신을 향한 질문이며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다. 동시에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지점이다. 작은아들은 자신이 왜 돼지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조차 얻을 수 없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아버지께로 발길을 옮기는 애처로운 용기에는 한 인간의 주체적 결단만 있는 게 아니다. 성찰은 자신의 한계성을 인지하면서도 타자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작은아들의 결단에는 아버지의 기다림과 고통이 전제되어 있다. 그 의미를 자각하는 걸 나는 ‘성찰적 회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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