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희망 – 마르 4:26-34 희망적인 소식을 듣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 경제적 어려움, 세계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무력 충돌, 전 지구적으로 휘몰아치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이상 징후가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득세로 부유함이 삶의 질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사회임에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깔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쥐어짜 타인에게 ‘있어 보이는’ 삶을 전시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우울과 불행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너진 개인은 생존을 위해 ..
행복한 이의 삶 - 마태 5:1-12 한 때는 순교나 성인에 대한 열의와 동경의 마음이 있어서 선교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자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차츰 현실적 사고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순교니 성인이니 하는 말은 나와 관계없는 남의 얘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뜨거움은 식고 헌신보다 안위가 먼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의 삶이 적당히 착하게 살아가는 정도의 교양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재림, 종말에 대한 신앙이 먼 미래의 일이거나 혹은 이상적 기대 정도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긴박하고 비장한 준비의 마음,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음 없이 관성적으로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 메마름을 봅니다. 왜 이렇게 무감각해..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요한10:1-10)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생사고락이 걸린 문제이다. 삯꾼 목자는 정식 문으로 버젓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칙, 편법을 쓰고 정상적인 문으로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데 이는 도독이며, 강도다. 이와 같은 속된 목자도 있다는 것이다. 소명이 아닌 삯꾼 목자는 자기 욕심을 채울 때까지 기다리다, 이리가 가까이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조직체의 상하관계, 신앙의 지도력을 이용하여 갑-질 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헌신을 신묘하게 강요하여 양들의 재물을 후리는 것이다. 결국은 삯꾼 목자의 영혼은 파리하게 되고 절망 가운데 오래 가지 못하고, 양들도 모이지 않고 도망가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양들은 삯꾼 목자의 행동과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
사라지지 않는 희망 오늘날 우리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구조 안에서 살아갑니다. 부와 권력이 힘 있는 소수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힘이 없는 다수에게 세상이란 단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미래가 불투명하고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우적대는 우리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웃의 외침에는 귀를 닫습니다. 세속적인 힘과 질서에 순응한 우리는 ‘나만 고통 받지 않으면 괜찮아’라고 자위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약자가 강자에게 충성하는 세속적이고 불완전한 형태의 거짓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주며, 차별 없이 서로의 부족함을 ..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본다.’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빛이 굴절되고 시신경에 전달되고 뇌로 전달, 정보가 처리되어 시각정보를 받아들여 대응하는 모든 상태를 말하는 것이 ‘본다.’라는 말의 첫 뜻입니다. 그 뿐일까요? 우리는 ‘책을 본다.’라고 말하면 그 책에서 정보와 지식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배우기도 합니다. 또 ‘시험을 본다.’는 말은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을 응용하여 답을 내는 과정으로 이 기회를 통해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숙 합니다. ‘다음에 우리 한 번 보자.’는 약속을 하고 그 사람과 만나 삶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근황을 이야기하며 교류하기도 합니다.‘내가 보기에는’이라고 말하며 나의 관점 즉 내 주장과 생각은 어떤지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