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 소금과 빛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곡식예물을 바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대교 제사에서 곡식예물을 바칠 때, 고운 가루로 갈려진 곡식에 소금을 뿌려서 불살랐습니다. 그 향과 연기로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곡식예물을 바치는 절차입니다. 소금을 뿌린 곡식예물과 이를 태워 밝혀지는 빛, 이것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산 제물이 되셔서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히시며 구원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예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향해 소금과 빛이라 칭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 때 존재의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올려드리는 귀한 제물로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희망을 품고 현실적으로 성육신은 희망을 품으면서도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게 해줍니다. 성육신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곳을 비추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빛을 보았음을 뜻합니다. 새로운 세계의 여명이 밝아 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환하지는 않습니다. 성육신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에 관한 가르침이면서 또한 무고한 한 사람이 골고다에서 잔혹한 십자가형을 받은 것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발치에 서기까지는 하느님이 성육신을 통해 뜻하신 바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기 어렵습니다. … 그렇기에 교회는 우리 가운데 여전히 슬픔이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사려 깊게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교회가 여전한 분투와 시시때때로 우리를 넘어뜨리는 패배를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고 마냥 행복한 얼굴로 발랄하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 1:5) 새로운 바이러스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가볍게 지나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대유행이 장기화됨에 따라 ‘코로나 블루’라는 정신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인 구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바이러스의 유행이 사람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마저 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짙은 어둠 속에 버려진 무력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세대, 바로 슬픔과 절망으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닐까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토록 짙은 어둠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 한편에 여전히 작은 기대와 희망이 꿈틀대며 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수많은 의료진들과 관계자들의 수고를 비..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처음 본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파악하시자,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향해 앞으로는 더 큰 일들을 볼 것이라 말씀하시며 51절,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야곱의 꿈을 인용하여 더 큰 일 볼 수 있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야곱의 사닥다리가 예수님으로 대체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닥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은 신약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