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징을 여는 믿음과 순종”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여러 기적 사화 중 오직 일곱 개의 ‘표징(σημεῖον)’만을 선별하여 기록했습니다. 모든 표징들은 각각 예수의 정체성과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즉, 기적 자체가 아니라 표징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 표징인 ‘가나의 혼인 잔치’ 바로 전에 예수께서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왜 요한이 이 첫 번째 표징을 이곳에 배치한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께서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시는 발언을 하십니다. 이에 놀란 나타나엘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요한 1: 49)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이러한 고백은 예수의 정체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나타나엘에게 “...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보다 더 큰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언급에 대한 첫 번째 응답입니다. 여기에는 시간적으로 ‘크로노스’의 시간이 뒤섞여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요청과 이에 응답하시는 예수님 간에 다른 시간적 흐름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시절부터 예수님과 관련되어 발생한 일들을 늘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루가 2:19)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시간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때’를 나름대로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러던 중 마침 그러한 것을 확인할 기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결혼식이었던지 식전장이 있는대도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본인이 나서서 염려를 합니다. 마리아는 단순히 손님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듯합니다. 그러니 하인들에게 명령을 할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간은 분명 예수님의 시간보다 빨랐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포도주를 언급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포도주에 담긴 그 너머의 의미를 생각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의 시간이 서로 겹치는 순간에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른 호칭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부인이여(또는 여인이여), 당신과 나에게 무슨 상관입니까?”(요한 2:4 비교)
공동번역에는 ‘어머니’로 번역됐지만, 직역하면 “부인, 당신과 나에게 무엇입니까?”입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일반적으로 여성을 칭하는 ‘구네 γυνή’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지금 마리아와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서로의 때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리아의 고백이 따라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런 말이나 대꾸도 없이 하인들에게 돌아서서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참 뚝심 있고 배짱 있는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이해보다는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니 재고 따지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머니로서 자신의 때를 자식에게 강요하기보다 이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작정합니다. 그 순종의 순간은 오히려 예수의 시간을 그녀의 시간으로 끌어오는 역사를 발휘합니다. 이것이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의 때가 열리고 첫 번째 표징이 나타난 이유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되었습니다.(요한 2:11) 믿음과 순종은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채창완 야고보 사제 (제주 한일우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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