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에게 벗겨지는 몸... 그러나 구원을 보이네
사람들은 과거 신앙을 팔고 예수를 소비했던 사람들 중에 가리옷 유다를 떠올리곤 합니다. 매년 사순시기가 돌아오면 가리옷 유다는 뭇매를 맞고 입도마에 올려져 난도질을 당합니다. 그가 예수를 팔았다는 오명이 2천 년 동안 줄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쯤 우리들도 예수를 팔고, 신앙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예수는 죽음의 형장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찢겨가면서 삶의 응달진 곳에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삶의 음지가 아니라 양지에서 삶을 꾸려가라고, 볕이 드는 그곳을 좋아하는 인간의 속성을 잘 알기에 피투성이의 벌거벗겨진 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음지에서 피어난 꾸밈이 없는 진달래가 분홍색으로 물들어,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을 드러내 주듯이, 서서히 배어오는 핏빛이 음지를 더욱 붉게 물들이면서 삶의 음지를 밝게 해주었다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가장 낮고 소박하고 소탈한 삶의 구석들 안에 구원이 자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음지가 싫어서 양지의 삶을 위해서 예수를 팔고 신앙을 팔아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일을 합니다. 삶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앙에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만이 존재합니다. 벗기고 또 벗기고 난 이후에 남는 것은 음지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진달래와 같은 꾸밈없는 삶일 뿐입니다. 예수의 옷이 벗겨질 때 그만큼의 나의 마음의 옷도, 나의 마음에서 그 무엇인가도 벗겨집니다.
비록 다 벗기고 벗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온전히 노출한 삶이라도 할지라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삶의 도타운 곳, 정다운 곳, 좋은 곳, 그곳이 바로 예수가 죽음을 맞이했던 사형장입니다. 예수는 낯선 이들로부터 옷이 벗겨지고, 낯선 이들의 시선에 보이고, 그럼으로써 수많은 낯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그 사건, 그 장소를 단순히 팔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벗겨진 삶으로 다가가며 꾸밈없이 자신을 내줄 수 있는 생산적인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리옷 유다만 나무라지 말고 말입니다.
“(…) 예수 팔아 썩어질 육체 보존하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하느님, 지금도 그분은 외로우십니다(권정생, “김 목사님께”,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1986, 164-165).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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