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소중함
오늘 창세기 말씀은 인간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에사오와 야곱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자권'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에사오에게 장자권은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에사오와 야곱의 차이는 이를 귀하게 여긴 것과 그렇지 않은 차이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성인이라면 본인의 의지와 결정으로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에사오는 '장자권'을 경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하느님의 은총을 경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실낙원 당한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말씀을 경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들에게 관대하고 하느님께 엄격한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에사오는 육신의 배고픔을 못 이기고 하느님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고통이 하느님의 장자권보다 더 귀중했던 것이지요.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로마 8:6
이는 육적인 것에 마음을 쓴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죽음을 생명과 평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도 바울로는 사용합니다. 죽음은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육을 먼저 생각하는 것. 육신의 염려와 세속적인 축복과 영광에 매달리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이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 그리고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 등이 모두 육신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육신적인 것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의 물질과 영광, 자신의 안위 만을 쫓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살려고 아웅 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소유로만 평가하고 존재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셔서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더라도, 만약 그들이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고 즉시 회개했다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류의 실존도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에사오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회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의 죄를 타자에게 전가하거나 회피했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탓이라고 변명을 했고, 하와는 뱀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에사오의 경우는 장자권을 앗아간 야곱을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이 경솔했다는 생각보다는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분개했습니다. 야곱이 비록 정직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긴 것만은 분명합니다. 리브가의 예언대로 결국 야곱인 동생이 장자권을 획득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경히 여긴 에사오는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들은 먼저 선택받았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에 이릅니다. 은총을 소중이 여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채창완 야고보 신부 / 제주우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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