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누구나 처음(마태 15,21-28)
혹 동료나 친구의 빈자리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심리적 공간이든 물리적 공간이든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그 사람이 없을 때 그 적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초조함을 넘어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함께 있어야 할 자리는 마땅히 그리 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매뉴얼과도 같습니다. 형식이나 법칙, 논리적 필연과도 비슷합니다. 규칙과 항상성에 따라 자리에 들고 나감은 나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더 갖게 만듭니다.
타자의 빈자리는 기실 나의 빈자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내 옆 빈자리에 있어야 할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오직 내 옆 빈자리의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그 빈자리에 그 사람이 와야 내 일이 시작됩니다. 내 일이란 그 빈자리에 그 사람이 와서 같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빈자리가 있는 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빈자리의 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빈자리의 그 존재가 있었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빈자리의 소중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단순히 없음, 비어 있음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구든지 그를 차별하지 않았던 존재가 예수였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보다 빈자리가 허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애초에 그 자리는 빈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빈자리가 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그 빈자리의 실제 주인이 누구라도, 반드시 빈자리를 찾아 그 자리에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내가 있는 자리도 빈자리였습니다. 누군가의 안타까워하는 마음, 아쉬운 마음과 꼭 빈자리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서 나도 빈자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채워진 자리와 빈자리는 짝입니다. 빈자리에 채워진 사람이 옆 빈자리에 나를 불렀던 것처럼, 나도 내 옆 빈자리에 관심을 주고 시선을 주고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남녀노소, 흑인백인, 인종[혹은 人畜]과 상관없습니다. 빈자리는 그가 어떤 존재라도 거기에 꼭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구원은 내 옆 빈자리에 꼭 있어야 할 존재가 자신의 전부를 던져 얻어내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 옆 빈자리를 ‘측은히 여겨’(ἐλέησόν) 어떤 존재라도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는 존재에 의해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저 그 빈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의 욕구나 구원의지(ἐλέησόν με, κύριε υἱὸς Δαυίδ; 이것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의 시초가 되는 탄원일 것입니다)를 분명하게 인식할 뿐입니다.
마음을 빈자리에 돌려줄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빈자리의 존재를 ‘불쌍히 여기고’(ἐλέησόν) 도와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빈자리에 있게 하지 못하더라도, 빈자리가 더 이상 비어있지 않도록 흔들리는 시선이라도 채워야 합니다. 주인의 밥상 아래로(πιπτόντων ἀπὸ τῆς τραπέζης) 시선을 떨구더라도 결국 마음잡지 못하는 것은 빈자리 속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빈자리에 하염없는 ‘연민의’(ἐλέησόν) 눈빛을 보내는 존재가 오늘 그 빈자리 속 하느님과 주인이 될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오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채워진 자리만 생각하고 빈자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이 예수와 우리의 차이입니다.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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