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
오늘 복음 말씀은 세 파트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말씀처럼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와 결국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은 아들이 다 알고, 아버지께서 택하신 이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다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니,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예수님(당신)과 함께하기를 초대하십니다.
이 세 부분을 정리해보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신호와 그 신호를 받아들이는 인간 사이에서, 그 주체는 단연코 신호를 보내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신호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인간이 우위에 있을지, 하느님께서 우위에 있을지. 분명,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과 의지가 있기에, 매번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착각합니다.
성공회의 하느님을 만난 것은 나의 선택이었을까. 분명 내 삶을 틀게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을 텐데 말이죠. 기존의 삶을 틀었기 때문에, 성공회 하느님을 만났는가. 아니면, 성공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내 삶이 틀어졌는가. 나 위주의 생각이죠. 결국, 어떤 종교에 국한되어 있는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또 한 번 동행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복음을 들여다보면, 내가 피리를 불고 있는데, 왜 하느님은 춤을 추고 계시지 않는가요. 나는 울고 있는데, 왜 하느님께서는 가슴을 치고 있지 않으신가요.라는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나 중심적 신앙고백. 그러면 다시 주체를 내가 아닌, 하느님께로 다시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다음 단락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이는 바로 예수 당신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느님보다 우위에 설려고 하는 소위 똑똑한 이에게는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가 설 자리가 없겠죠. 그러면, 똑똑하다고 이는 결국, 나 중심적 신앙적 태도이겠지요.
우리는 왜 하느님을 섬기는 선택을 하였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왜 하느님을 섬기는 이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주체가 우위에 설려고 시시비비를 따질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신앙적 태도를 새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닌, 하느님이시라는 것. 내 삶 전체의 주관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 끝에 나온 말씀처럼, 예수님의 몫이 나의 몫이 되는 일치를 경험하게 되겠지요.
문관우 스테파노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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