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음”과 “시례야(是禮也)” - 마르 13:24-37
어느 날 공자께서 주나라 주공을 모시는 태묘에 들어가 제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시고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이 공자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잘 안다고 소문난 공자가 알고 보니 제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때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례야(是禮也)" 즉 "묻는 것이 곧 예니라."라고. 이는 논어 [팔일] 편 3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뜻은 '예(禮)'는 하나의 정해진 정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인즉 자기의 '예'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예'를 물어 조화 속에서 깨닫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이 '예'를 가르치면서 자신이 아는 '예'만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예'를 완성해 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여 남에게 강요하는 순간 '예'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와 형식이 고정되고 정해지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의 형식으로 강요될 때 '예'는 그 정신을 잃고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도 "장례를 주도 면밀하게 잘하는 것이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바로 세우는 것은 결국 마음을 바로 세우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의 본 뜻을 유추합니다. '깨어 있음'은 공자가 말한 '예'를 세워가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깨어 있음'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기다림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안다고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며 타자를 향해 열린 마음입니다. '예'를 세우기 위해 타자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들을 준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질문은 듣기 위해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예'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 배우며 함께 세워가는 과정입니다. 늘 완전함에서 조금은 부족한 상태가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겸손한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겸손의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언제부턴가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독선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독선은 자기확증편향이며 깊은 어둠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무덤'입니다. 그것에 빠지면 자신만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몰락하게 합니다.
우리의 '깨어 있음'은 자기 수양을 통해 자기 자신만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자처럼 타자에게 겸손히 질문하면서 경청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깨어 있음'은 나의 각성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웃에 대한 각성 또한 포함되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관심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밖의 세상을 직시하고 타자와의 관계성을 세워가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나와 다른 세계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려면 물론 자기 자신이 먼저 깨어 있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자를 자기 자신에게 맞추기 위해 우리는 확증편향의 기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자기의 문제에만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타자를 향해 깨어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깨어 있음'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타자에게로 순차적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소크라테스처럼 먼저 자신에 대한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하여 타자와 함께하는 지혜에 이르기 위하여 서로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인 진리를 출산하는 '산파술'이며,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채창완 야고보 사제(제주우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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