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밤, 한 여인이 낳은 밤 - 루가 1:26-38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Χαῖρε, κεχαριτωμένη, ὁ κύριος μετὰ σοῦ; 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 천사의 인사말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Ἰδοὺ ἡ δούλη κυρίου· γένοιτό μοι κατὰ τὸ ῥῆμά σου/ Ecce ancilla Domini;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여인의 화응(和應)입니다. 천사의 전언과 마리의 응답은 마치 대구를 이루듯이 글맛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이의 말은 지금 당장 듣는 이에게 머무릅니다. 그 말은 곧 실현되어야 할 말씀이 됩니다. 말을 이행해야 할 주체는 무심코 듣는 이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머무는 이가 그 말을 즉시 이루는 것입니다. 말의 진실성, 곧 진리로서의 말씀이 확증되는 순간입니다. 현존은 즉시, 곧, 당장 받아들이는 이의 믿음의 상태와 확신에 따라서 그 말씀의 효용성으로 나타납니다.
말이 단순한 말로서 미끄러져 사라지는 고막의 환청과도 같은 일시성이 아닌 영원성이 되는 순간, 고백의 말씀으로 변합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종은 듣고 따르는 존재입니다. 듣고 따를 때 말씀의 머묾, 곧 현존은 지속적 현존으로서 자신의 머묾을 버리지 않습니다. 말씀(logos)은 비상식, 비논리, 말귀를 못 알아듣는 비이성(alogos, 이해력의 부족)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빚습니다.
시집을 가는 처녀는 수줍음과 막연한 긴장감을 넘어야 하고, 재를 넘어 그 다음의 집에서 새로운 삶을 빚기 위해서 말씀의 실체를 현존하는 존재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라는 응답은 “새로운 삶을 짓기 위해서 지금의 깊은 밤을 넘어서겠습니다”, 혹은 “번민하고 혼란스런 마음의 밤을 넘어서 말씀에 따른 새로운 삶의 집을 짓겠습니다”라는 결단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현존으로 머문다 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밤에 인류의 밤을 구원할 씨앗을 잉태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혹독한 시련의 밤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처녀의 잉태는 처녀라는 미경험과 잉태라는 경험의 모순된 조합입니다. 낮과 밤의 만남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처녀의 잉태는 밤 위에 밤을 덧칠하는 것이니, 넘어야 할 고비가 더 심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야 할 고비를 꽃가마로 넘지 않습니다. 그녀는 말씀의 머묾, 끝끝내 동행할 현존으로 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차원이 다른 마리아(한 여인)의 ‘세련된 대답’의 실상입니다.
미상불 여인의 세련된 응답의 실상은 다음과 같은 시적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을 내다본 것은 아닐까요? “지금도 눈을 감으며/ 까아만 말구유/ 창밖으로/ 빠알간 등불이 하나/ 빤짝 켜진다// 지금도 귀를 기울이면/ 아기 예수님의 숨소리가/ 쌔근쌔근 들린다”. 까만 밤은 말(logos)이 희미해지고 비이성과 비논리(alogos)가 엄습해 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집가는 처녀의 날(시기)는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비이성과 비논리의 힘이 강해지는 불확실성(미지의 불안)의 밤을 넘어서야 대낮 같은 확신의 시간을 맞이하기 때문일까요? 젊은 연인들이 밝은 낮에 혼인(婚姻)하는 것은 말이 머무는 현존의 실체를 기다림이 없이 곧장 확인하겠다는 것인지 가뭇해집니다.
어두운 저녁 이후 좀 더 어두워져서 혼례(婚禮)를 치르던 과거, 말씀의 실체를 어스름한 밤을 통과하게 하는 현존의 약속으로 보았던 한 여인의 응답 속에 오늘날 무한한 현존의 역사(役事/ 歷史) 가능성을 엿보게 됩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폐기된 밤을 세련된 언어로 구원의 밤으로 살리는 한 여인의 응답이 이를 증언합니다.
-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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