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물으셨다. 참 너는 자유하냐고 – 요한 1:43-51
전례적 교회가 지키고 있는 성서정과의 전통은 매우 소중하지만, 성서학적으로 모든 독서들이 하나의 주제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읽는 신자의 마음이 더욱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신기하리만치 세 본문의 주제가 비슷합니다.
제1독서의 히브리 성서에서는 사무엘과 하느님의 첫 만남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소리를 들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소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배려하시면서 계속해서 불러주시지요. 저는 이 장면이 매우 설렙니다. 마치 지극히 애틋한 사랑을 품고 서로를 찾아가는 연인의 손짓 같아 보입니다.
제2독서의 서신성서는 바울로 사도께서 그의 애증의 관계인 고린토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는 절절한 마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고린토 교회 공동체는 당시 시대의 인간 군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시대 가치들,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칠 정도의 자유가 만연하던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지요. 그런 고린토 교회를 향해 바울로 사도께서는 그대들이 누리고자 하는 자유가 진실로 그대들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고 절절히 외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와 필립보 그리고 그의 벗 나타나엘, 이 세 인물에게서 벌어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떨림과 설렘을 느낀 필립보가 자신의 친구를 찾아가 예수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원칙과 관념에 근거하여 예수를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를 만납니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너의 원칙과 신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만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후 나타나엘의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복음서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여러분은 어떻게 묘사하고 싶으십니까?
하느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계산된 의지나 강한 신념으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하는 바를 하느님의 길이라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 예수의 삶을 진실로 동경하고 따르는 것은 ‘욕망과 의지를 걷어낸 참 나’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그 어떤 언어의 그릇에도 담기지 않을 나,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사무엘처럼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나타나엘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된 자유를 향해 돛을 올리십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자유롭게 사십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이신효 스테파노 부제(주교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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