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자르!(하느님께서 도우신다) - 루가 16:19-31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는 문학적 구조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역전逆轉’입니다. 한마디로 ‘뒤집어지는’ 구조입니다.
숨겨진 역전구조의 첫 번째는 ‘이름’입니다. 거지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고,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엘리아자르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인데,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거지는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이름을 지녔는데, 부자는 아무 이름이 없습니다. 까닭은 부자는 자기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반면에 거지는 하느님이 도우시는 자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기를 바랄까요? 가진 것이 많아 하느님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비록 가진 것이 없어 비참하고 힘들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일까요?
생각은 후자의 삶이 답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자이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라자로의 삶을 한 번 보십시오. 종기투성이 몸으로 앉아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하고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고 합니다.
누가 이 비참한 지경의 삶을 바라겠습니까? 내세의 천국이 보장된다 해도 당장의 비참함과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우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하게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동행함이 나의 의지와 결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유함과 가난함, 하느님 없는 삶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선택은 나를 중심에 둔 가정적 질문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와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고난과 고통 중에 있다면 나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느님을 붙잡으면 될 것이고, 여유롭고 평안하게 살고 있다면 겸손히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들과 함께 하면 될 것입니다.
여유와 평안은 내 능력과 소유가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각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 거둬가실 분이 하느님이시니까요. 엘리아자르!
안균호 예레미야 사제(기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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