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양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재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행복한지 아닌지 갈립니다. 우리는 높은 지위, 학력, 명예, 좋은 생활환경 등을 원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돈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많은 것을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가요 가사에 ‘뭐니뭐니해도 머니’라는 말은 여전히 오늘 우리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돈을 벌고, 재물을 쌓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합니다. 누구는 꿈을 포기하고, 누구는 소소한 일상을 포기하고, 누구는 가정을 포기하고, 또 누군가는 인간성마저 포기하기도 합니다. 약 2천 년 전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성부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시며, 인류와 자연, 모든 생태계의 생명을 축복하셨나이다. 성자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어 피조물의 한계와 아픔을 고스란히 겪으셨으며,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새 창조를 이루셨나이다. 성령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 깃드시어 깊은 한숨으로 위로하시며, 당신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 되도록 하시나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지금 파괴된 창조질서 안에서 고통 받는 피조물들의 신음을 사무치는 마음으로 듣고 계시나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신 주님의 당부를 외면한 채 인간의 욕망과 편리함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저희..
이번 여름침묵피정에서 부드럽지만 너무도 단호한 하느님의 초대를 듣고 돌아왔다. 그것은 ‘일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으로의 초대’이다. 하느님께서는 기도, 예배, 피정과 같은 특별한 순간뿐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차원에 하느님의 현존이 스며들기를 요청하셨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삶이 곧 교회의 첫 출발점이면서 그 자체로 온전한 교회라는 깊고 강렬한 울림은 다시 한 번 나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해주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놓치고 하느님과 분리된 자기정체성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거짓자아’이다. 오늘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하느님과 분리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 판단, 평가, 분석을 만들어내는 내 안의 거짓자아를 떠올렸다. ..
우리는 매일 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몸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것을 참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생명(生命)이라는 단어를 살피면 ‘命을 산다(生)’, ‘命으로 살아간다.’라고 알 수 있다. 천명(天命)으로 살아가는 물(物)이 사람이라는 말일 게다. 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천명(天命)을 본 것이고, 참다운 사람을 본 것이다.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당신이 계시는 사람 말이다. 빵은 먹는 사람이 있어야 빵인 게다. 그렇지 않으면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온전히 먹어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몸만을 생각하면 어찌 둘이 하나가 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 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 복음 이후 60절에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제자들은 내 맘을 어떻게 알았을까? 제자들이 수군거렸다는 이 본문이 내겐 복음이다. 제자들이 수군거렸는데 나의 투덜거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오병이어 본문 이후 6장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집중한다. 만나, 빵, 예수의 살과..... 혹 교우들이 사제의 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 영국의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NewScientist)가 인간이 가진 잠재능력의 한계를 해석한 ‘인체의 12가지 극한’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인간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최장 1주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최상의 조건에서의 말이지요. 빵은 생명을 연장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입니다. 에너지원이 공급되지 않는 생명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닌 많은 사람들은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따라 다녔습니다. 그것은 비단 예수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요. 교육이든 예술이든 문화든 종교든 고유의 목적과 상관없이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선택하는 무리들이 늘 있어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
더위와 함께 찾아온 쉼의 시간, 방학과 휴가의 시간이지만 우리는 코로나19로 계속되는 긴장 속에 있습니다. 이로 인한 모든 힘겨움에 주님의 위로와 문안을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 모이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그 뜻을 깨닫길 바라며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 주님은 늘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빵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참된 지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체의 배고픔을 빵으로 달랠 수 있듯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정신적 배고픔을 해결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안내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빵은 ..
연약한 이들을 먹이시는 주님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과월절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전해 들었고 그러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자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기적과 육신의 배부름을 통해 사람들은 그러한 만족을 줄 수 있는 예수님께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는 등의 기적을 마주하며 하느님과 모세를 따랐던 히브리 민족을 연상하게 합니다. 과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난 사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병든 무리들의 소생 (마르6:30-34,53-56) 요즘 세대는 다양한 이들이 자기목적 성취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여러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활동을 하지만 유리감옥 생활 같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도 모르게 내외면의 불일치 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인식하지만,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목자 없는 양 같은 많은 이들이 측은이 여겨 주시는 목자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도심에서는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기괴한 돌출 행동하는 여러 중독자들이다. 사이비 기독교 환자들 신천지가 새롭게 날뛰고, 중증 정신병원 환자들이 약기운에 시내를 돌아다니는 느낌이라 할까? 또 코로나19로 지구촌 많은 이들이 우울증 환자! 지금..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주의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죄 씻음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제게 세례를 받으려 하십니까?”하는 그의 질문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계속해서 “나는 그분의 신을 벗겨드리는 것조차 할 수 없다.”고 겸손히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요한은 겸손하고 우직하게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으로 그의 사명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며 예언자로서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요한은 헤로데 왕이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이 옳지 않다고 간언합니다. 이에 헤로데는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어버립다. 헤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서 한 말은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을까?’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가르칠 때 내가 열린 마음이 있다면 그의 가르침은 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마음이 닫혀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 동네 목수 집 아들이다. 그 가족들도 이 동네에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며 선지자 행세하는 것을 보고 탐탁지 않고, 무언가 못 마땅해 집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고향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도리어 불편합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두 여자가 나옵니다. 한 여자는 열두 해 동안 하혈증(유출병)을 앓고 있는 자이며, 또 한 여자는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입니다. 두 여자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부정한 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혈증(유출병, 레위 15:19-28)과 죽은 시체에 손을 대는 자(민수 19:11)는 부정한 자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관점을 벗어나서 두 여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예수님은 부정한 자를 치유했을까요? 부정한 자와 신체적 접촉이 있다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들의 무엇을 보고 치유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는 그녀의 믿음을 보았고, 회당장에게는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