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각성 - 마태 25:1-13 혼인잔치는 천국잔치와 같이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자는 신랑을 기다리면서 켜야 할 등불의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등이 아니라 기름입니다. 모두에게 불을 켤 수 있는 삶을 주시지만, 거기에는 함께 행해야 할 기름의 삶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믿음이나 선한 행실을 말하고 가깝게는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한마디로 사랑의 삶인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기대보다 신랑이 늦게 오면서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재림의 지연에는 잃은 자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하느님의 긍휼의 마음이 담겨져 있으나, ..
행복한 이의 삶 - 마태 5:1-12 한 때는 순교나 성인에 대한 열의와 동경의 마음이 있어서 선교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자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차츰 현실적 사고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순교니 성인이니 하는 말은 나와 관계없는 남의 얘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뜨거움은 식고 헌신보다 안위가 먼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의 삶이 적당히 착하게 살아가는 정도의 교양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재림, 종말에 대한 신앙이 먼 미래의 일이거나 혹은 이상적 기대 정도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긴박하고 비장한 준비의 마음,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음 없이 관성적으로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 메마름을 봅니다. 왜 이렇게 무감각해..
이웃을 향해 사랑이 흘러가도록 - 마태 22:34-46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찌 대답하는가 한번 보자는 심사에서 율법서에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 레위기 19장 18절을 언급하시며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카르디아)은 진정한 의지, 목숨(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정말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뜻(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전 인격을 기울여서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 전 생애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다 원어(..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고, 돈은 카이사르의 것이다 - 마태 22:15-22 저들은 예수님을 세금 논쟁에 끌어들입니다. ‘그렇다.’ ‘아니다.’ 라고 답하는 순간 바로 올가미에 걸려드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당시 바리사이파는 로마황제의 세금 징수를 거부했고, 헤로데 사람들은 세금을 냈습니다. 세금 징수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두 정파가 예수님을 공동의 적으로 삼고 공격합니다. 저들의 정쟁 안에 예수님을 끌고 들어와 어떻게든 함정에 빠뜨리려 협공합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보려는 농섞인, 애정어린 질문에 아이는 잠시 곤란한 척하며 “엄마 아빠 둘 다 좋아!!”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 마태 22:1-14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기로 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는 이야기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종들은 이미 초청 받은 이들을 찾아가 초대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이에 왕은 다시 종들을 시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오도록 청하라’고 합니다. 종들은 임금의 말에 따라 사람들을 청했고, 잔치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혼인 잔치는 아무래도 중요한 사람, 그 자리에 와줬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런데 왕은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이들 대신에 정말 알지도 못하는 사람, 종들이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청해 잔치를 채웁니다. 임금이 잔치를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 마태 21:33-46 이 비유는 로마시대의 토지제도 속에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 구조를 통해 마태오 저자는 교회공동체에 전하고 싶은 숨은 뜻이 우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석은 33절이 이사야 5:1-2을 차용한 것이라 알려옵니다. 그 뜻은 포도원의 의미가 “유태인들에게 주었던 하느님의 나라”라고 말하면서 우의적 해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 주인의 뜻을 거부한 소작인, 아들 상속자, 새로운 소작인”은 누구를 상징하는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 본문은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소작인 세워 포도원을 맡길 것이라”고 전하고, 이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