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수난
악기를 손봐 달라며 내 작업실에 오는 첼리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는 그 표정이나 말투가 꼭 아이를 병원에 데려온 부모 같습니다. 사실 많은 연주자에게 이런 상황은 병원에 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며칠간 내 작업실에 악기를 맡기고 갈라치면 그들은 전신 마취에 동의하고 아이를 수술대에 눕힌 부모처럼 불안해하지요. 얼마 전에 한 첼리스트가 찾아왔습니다. 며칠 뒤에 중요한 솔로 연주를 해야 하는데 첼로의 A현이 완전히 막힌 소리가 난다며, 이런 상태로 솔로 연주를 할 수가 없다고 난감해했습니다. 음악가에게 악기는 거의 신체 일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첼로의 음이 변한 상태를 설명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오른팔이 마비되거나 손가락이 아픈 것처럼 말합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악기는 그의 일부입니다. 음악가는 악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니까요. 악기는 그의 목소리입니다.
첼리스트가 나의 작업실에 앉아 괴로운 표정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계시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나는 그 첼리스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첼리스트의 모습에서, 인간이 막힌 음을 낼 때 고통스러워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 듯 했습니다. 열린 음을 되찾고 싶어 하는 첼리스트의 심정에서, 나는 인간이 제 음을 찾지 못하고 막혀 버렸을 때 못내 안타까워하는 하느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악기입니다. 나는 나의 생명, 즉 나의 시간과 힘, 내 생각과 감정, 나의 수고와 창조성을 탄생하는 악기에게 내줍니다. 나의 생명을 악기에게 사랑으로 내줍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수난을 봅니다.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사랑을 택한 사람의 삶은 고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자신을 내 줄줄 아는 사람은 이미 영생의 살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 힘입어 삽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 안의 예수를 의식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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