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와 그 자리에 님이 있을 때 – 요한 1:47-51
물리적 세계에서는 한 측면을 알게 되면 그 계의 다른 측면의 지식을 배제하게 됩니다. 이것은 물리학자 닐스 보가 주장한 ‘상보성의 원리’라는 이론입니다. 이를 함석헌의 ‘임이 오신다’는 시와 더불어 오늘의 복음을 번안한다면, 님이 오신다고 서둘러 소지를 하고 님이 오신 곳과 님이 거처할/당도할 곳을 계속 생각하며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 자기 자신의 맘, 자기 자신의 때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 자신의 맘, 맘이 머물고 있는 지금의 때, 자리입니다.
나타나엘이 머물고 있었던 때, 그 자리를 알고 있었던/보고 있었던(εἶδόν) 것은 과거의 그 때 그 자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이 있었던 지나간 그 때와 자리를 ‘과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때, 그 자리를 언제나 이 때, 이 자리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나타나엘을 ‘거짓 없는 사람’(δόλος οὐκ)이라고 말한 그 이면에는 항상 그 때, 그 자리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란 그 때와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맘을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호명의 그 때와 그 자리가 달라지더라도 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내가 님 곁에서 산다는 믿음이 아닐까요? 님이 저 멀리서 오고 있다거나 막 당도하고 있다거나 하는 물리적, 상상적 그 때, 그 자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맘을 밝히고 맑게 하는 님이 지금 곁에 있다는 생각이 거짓이 없게 합니다. 거기에 기실 내 맘이라는 게 있을까요? 오직 님 곁에 있다는 내 믿음만 있습니다. 맘은 님이 밝혀야 맘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맘은 그가 부르기 전에는 맘이 아닙니다. 님이 불러야 내 곁에 님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면서 맘을 생각하고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어렴풋하지만 늘 그 때, 그 자리에서 님 곁에 있다는 믿음, 님이 부르실 거라는 믿음으로 여여하게 맘을 ‘향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점점 더 내 곁에 가까이(nahe)에 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맘은 님으로 가득해지면서, 님을 위한 외면적 소리로 몸과 맘이 분주하여 맘을 찾지 못했던 나에게, 맘을 보도록 해줍니다.
그간 몸으로 분주했던 그 때, 그 자리를 휘적대며 길을 나섰던 나타나엘. 그러나 예수는 늘 그 때, 그 자리에서 몸이 아니라 맘을 가지고 일로서 대하고 신앙으로 대하여, 마침내 더 큰 일들을 그 맘에 새기고 싶어합니다. 몸이 바쁜 사람은 맘을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맘을 찾는 사람은 몸과 일까지도 잘 알아차립니다.
현대인들은 몸의 일에만 분주하면서 이미 지나간 그 때, 그 자리에 연연하고, 아직 오지 않은 그 때, 그 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는 ‘늘 지금 여기에서 이 때(그 때), 이 자리(그 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 곁에 있으면 맘은 지금 여기에서 이 때, 이 자리에 머뭅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시선이 몸에서 맘으로, 나에게서 예수에게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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