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하느님께 – 욥기 38:1-7, 34-41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완전한 평야에 있다고 상상합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1km가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 거리가 5km면 어떨까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 거리 있는 사람을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 거리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우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거기 있다고 전해 들을지라도, 그가 있다는 것조차 의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멀어서 그를 느끼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지요.
이제 잠시 시선을 바꿔서 내가 양쪽에 있는 두 사람이 아니라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전지적 작가’라고 상상해보십시다. 그 둘 사이 1km 상공에서 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고개를 많이 돌려야 하긴 하지만, 두 사람이 보일겁니다. 만약 10km 상공이라면 어떨까요? 100km 상공이라면 어떨까요? 이런 원리를 통해 생각해본다면, 아무리 지구의 동쪽 끝과 서쪽 끝과 같이 멀더라도, 그 두 사람을 일직선처럼 보는 방법은 그 두 지점이 일직선처럼 보일 때까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된다는 것이지요.
오래 전 한 교부는 이것이 바로 ‘우리를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라 말합니다. 나의 신앙적 견해, 정치적 이념, 도덕적 관점 등이 너무나도 달라서 도무지 공통되는 지점이 하나 없는 “적”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시선에서는 일직선에 있다는 말이지요.
“하느님과 인간은 자석의 동극처럼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하느님 스스로가 세우신 섭리이자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원칙을 하느님 자신이 스스로 깨부수시고 인간을 자신의 주변에 두셨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 칼 바르트
오늘 욥기 본문은 지난 서른 네장에 걸친 욥과 친구들의 갈등을 끝내고, 하느님이 직접 그들에게 처음으로 등장하시는 장면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극단적으로 대립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받는 의인, 억울한 의인인 욥의 상황을 제대로 듣지도 않으며 자신의 고집과 주장으로 우깁니다. “네가 벌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신앙이 가진 ‘확신’ 말입니다. 욥은 강변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말 좀 들어봐라!”
욥기의 후반부는 욥의 회개나 뉘우침을 표현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이 크신 하느님의 크기와 그것을 느껴버린 인간의 벅참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진실로 하느님을 나의 감촉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소화할 수 없는 벅참으로 소용돌이 칠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두려움과 존경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처럼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이 계신 거리를 좁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을 따라갈 수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그분이 스스로의 원칙을 깨부수시고 자신의 주변에 우리를 두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신효스테파노부제(주교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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