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조차도 지우는 - 루가 23:33-43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du wirst noch heute mit mir im paradies sein, 존재 동사 sein을 주목하십시오; 루가 23,43)라는 선언은 꾹꾹 내리누른 글자, 죄의 명목과 죄인의 신분, 죄의 내용에 관한 흔적을 지우는 파격입니다. 그가 지닌 죄인으로서의 흔적들을 말소시키는 그분의 대담함 속에서 stylus(동필 혹은 철필; ‘뾰족한-끝’, sti-lus)를 거꾸로 뒤집어서 “금속 날의 판판한 부분으로 가구 표면의 밀랍의 쓰인 글씨를 지우는”(Pascal Quignard, 송의경 옮김,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23, 87) 듯합니다. 낙원은 과거의 흔적을 말소했다는 상징입니다. 낙원은 도려낸 자국 위에서 갈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상태, 존재의 자리입니다. 낙원은 ‘단순히’ 믿음 위에서,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존재 변화의 거처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강도(왼쪽 강도는 latro, 오른쪽 강도는 fur)라는 위치, 곧 강도라는, 살인이라는, 도둑질이라는, 살인, 폭력, 상처, 파괴의 시간의 기록과 글자에 대한 ‘무효화’를 득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존재 변화입니다.
예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마지막 선을 남기는 자입니다. 죽음에 이르려는 순간, 과거의 죄된 흔적으로 영원히 사라져 기억되지 못할 존재로 전락할 수 있는데도, 그는 인간의 마지막 죽음조차 밑줄을 긋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도려내려고 자비를 베푸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거의 죄인이었던 존재의 흔적, 죄의 내용의 기록들이 말소되어진 존재를 뜻합니다. 하지만 도려낸 자국은 남아 있습니다. 흔적을 지운 자국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흔적은 도려낸 자국을 상기하고,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그곳을 쳐다보라는 것은 ‘너희가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말소의 흔적/자국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존재가 변화된 상태이고, 바로 낙원에 있는 듯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형수로서, 죽음이 드리워진 죄인의 존재로 있다면, 그의 자비와 긍휼에 기대어, 죽음에 마지막 선을 남기게 해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단, 용서받아야 할 글자, 날카롭게 새겨진 그 글자를 말소시켜 달라고, 당신은 그러실만한 거룩한 흔적을 가지신 분, 곧 ‘왕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의 흔적, 신앙형식을 갖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대식 토마스아퀴나스 사제(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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