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끝에서 하느님의 자유를 보다 - 마태 26, 14-27, 66
한 인간의 배반과 부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cogito)을 갖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물화, 대상화시키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은 불러 모음(cogo), 집결하여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불러 모음, 안으로 모아들임, 곧 신앙의 내면성이 없다면,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 또한 없습니다. 모아들임의 주체, 생각을 모아서 안으로 가짐은 인간이 하는 일이나 그 내용은 신에 관한 의식이어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내면성, 진리의 내면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마태 26,39). 늘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을 가지고 동시에 하느님에 관한 의식으로 충일했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의 내면성, 진리의 내면성을 위해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조건이나 환경이나 대상성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 자기 자신 안에 모아들인 생각, 신앙의식, 하느님에 관한 의식으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내면성과 확실성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이 아닌 것을 덜어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의식으로 더 깊이 내려가 자신의 내면성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혹여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이 아닌 다른 의식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배반입니다. 숭배입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성, 그 속에 있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불신앙은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군중(mass) 속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성에 있는 자유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리 속에 숨어버립니다. 자신의 내면성을 통한 주체적이고 고독한 단독자(Einzelne)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자기를 속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충동, 선동합니다.
“하느님은 나의 내면보다 더 내밀하시다”(intimior intimo me).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나의 내면성 안에 더 깊은 내면성인 그분이 나를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으로 만듭니다. 나의 내면성 안에 침잠할수록 그의 의식을 읽게 됩니다. 그의 의식을 읽으면 배반과 배신이 아니라 확신을 갖게 됩니다. 부인하지 않으며, 무기에 숨어 개별로 부른 단독자의 실존을 망각하지 않고, 오직 진리의 내면성에 따라 하느님의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그 존재의 뒷모습에서 입술을 앙다문 채 법정에 선 예수의 확신에 찬 모습에서 나의 내면성을, 궁극의 내면성을 확인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Vere Dei Filius erat iste!; 마태 27,54). 백부장의 입을 통해 그의 내면성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김대식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서대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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