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마을에 평화는 없고… - 마르13:1-8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강이 사해와 만나는 지점에서 지중해로 가는 이스라엘 중심부 산악에 위치한 도성 예루살렘은 오랜 기간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었다.가나안 여부스족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땅을 여호수아가 점령하고 다윗 이후 예루살렘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지만, 바빌론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느헤미아와 백성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재건하지만 ‘평화의 마을’ 에 세워진 성전은 여전히 이방인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고 경고하고 여인을 대놓고 차별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힘과 폭력, 차별이 당연시되는 성전’이 세워진다.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성전이라 불렸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엔 700명의 사제들..
타자를 위해 내어놓는 삶 – 마르 10:17-31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는가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최승자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의 발췌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 백성의 확장 –마르 7:24-37 6년 전 노틀담 대성당에 화재가 났었습니다. 그 노틀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에 노래하고 춤추는 가난한 사람들과 걸인들과 이방인들이 등장합니다. 아름다운 이방의 집시여인 에스메랄다, 그녀를 사랑하는 종지기 곱추 콰지모도, 그녀를 소유하려는 신부 프롤로가 있습니다.애욕과 권력에 취한 프롤로 신부가 에스메랄다를 죽이려 할때, 그녀는 이방인인 자기와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아베 마리아’를 간절하게 노래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걸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신부의 노래와 춤의 대결이 거칠어지며 죽음으로 치달아 갑니다.마르코 복음서 7장 속의 예수님도 이..
유일한 희망 – 마르 4:26-34 희망적인 소식을 듣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 경제적 어려움, 세계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무력 충돌, 전 지구적으로 휘몰아치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이상 징후가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득세로 부유함이 삶의 질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사회임에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깔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쥐어짜 타인에게 ‘있어 보이는’ 삶을 전시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우울과 불행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너진 개인은 생존을 위해 ..
논리성의 오류, 제 다리에 걸리지 않기 – 마르 3:20-35 토론이나 논쟁의 경험이 있으신지요? 논쟁과 토론에서는 ‘경청’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다른 측면은 ‘나의 주장이 더욱 타당하다는 점, 반대편이 나보다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정중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설득력은 “상대보다 얼마나 더 논리적이냐?”뿐 아니라 “상대가 자기 주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논쟁태도는 곱씹을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사무엘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겠습니다!”라는 그들의 주..
가파르나움 그날,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마르 1:21-38, 원성희 아모스 사제(서귀포교회))
2024.02.05
가파르나움 그 날,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마르 1:21-38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역은 가파르나움에서 시작됩니다. 마르코 저자는 가파르나움 24시간, 한 날(안식일 아침 회장 예배부터 다음날 새벽 기도까지)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가파르나움 하루 동안 이루어지는 일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가파르나움의 첫 시작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과 더불어,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26절), 그 날 오후 열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31절), 그리고는 같은 날 저녁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34절). 오전, 오후, 저녁 시간 흐름에 따라 치유와 관계 회복이 확대되는 모습을 볼..
“깨어 있음”과 “시례야(是禮也)” - 마르 13:24-37 어느 날 공자께서 주나라 주공을 모시는 태묘에 들어가 제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시고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이 공자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잘 안다고 소문난 공자가 알고 보니 제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때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례야(是禮也)" 즉 "묻는 것이 곧 예니라."라고. 이는 논어 [팔일] 편 3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뜻은 '예(禮)'는 하나의 정해진 정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인즉 자기의 '예'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예'를 물어 조화 속에서 깨닫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