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아기가 낸 균열 - 마태 2:1-12(이신효 스테파노 사제(교무국))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믿어 온 신앙의 체계가 예수와 제자들이 처음 품었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굳어져 온 것이라면?” “우리가 위로받아 온 이 신앙이 그저 오랜 시간 쌓여온 인간의 바람과 두려움의 산물이라면?” 인간은 불안할 때, 설명이 필요할 때, 질서를 세워야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왔습니다. 하느님은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를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교의 핵심 전제인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지만 동시에 성서를 읽기 전 이미 결론을 정해 놓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읽기도 전에 그 내용의 결론을 알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예수는 옳고, 반대자들은 틀렸으며, 무지한 민중은 깨닫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교 덕분에 예수를 알게 되어 감사하면서도, 그리스도교 때문에 예수를 그만큼밖에 알지 못해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AD 80–9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 극심한 혼란 속에서 쓰였습니다. 그 속에서 저자는 수십년전 한 인물의 탄생을 “로마 제국과 헤로데, 유대 종교 권력이 삼중으로 민중을 억누르던 시대”라는 배경에서 묘사합니다. 거기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축복이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이로써 마태오 복음의 예수의 탄생은 초월적 신화가 아니라 억압적인 현실 한복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전환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자리에서 한 아기가 견고한 질서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진실을 묻기보다 이미 작동하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질문합니다. 이는 거대한 담론 뿐 아니라 나의 인생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네 설명되지 않는 삶을 견디게 해주지만 동시에 서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 그런 거야.” “이게 맞는 거야.” 그 말들 앞에서 다양한 질문은 멈추고 다양한 삶도 멈춥니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 탄생 서사는 바로 그런 세계 한복판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새로운 설명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로,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자리에서 이 세계에 균열을 냅니다. 성탄은 우리를 더 빨리 확신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천천히 머무르게 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내려온 결론들 사이에 질문 하나를 남겨 두시는 분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내신 여백을 깊이 묵상해봅니다. 그 틈에서 우리 안에서 작은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고, 그 작은 아기에 우리의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이신효 스테파노 사제(교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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