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 - 루가 2:22-40, 박준헌 미가 사제(마산교회 보좌사제)
2025.01.31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 - 루가 2:22-40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두 인물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고 또 한 사람은 안나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며 오래 기도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신다는 이야기를 선포했고, 안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기쁨으로 알렸습니다. 시므온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선포했고, 안나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이 둘은 힘을 합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리는 사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루가3:15-17,21-22(박용성 바르나바 사제(서대구 교회))
2025.01.1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3:15-17,21-2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고귀하고 정결하고 값비싼 것이어서, 일상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한해 한번은 찾아가야 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순례 경비 또한 버거웠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번제물의 비용 또한 무거웠고, 만나서 하느님 말씀을 듣기에 제사장은 너무 먼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요르단강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나와 회개받을 수 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산과 계곡을 흘러 내려와 갈릴리 호수가 되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되어 흘러가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가고, 아이들은 수영을 하는 그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 요르단강 세례자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눈을 뜨고 따라나섰다 – 마르10:46-52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 바르티매오가 예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예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앞 못 보는 이가 예수님을 통해 앞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는 아닙니다. 자비를 구하며 눈을 뜨게 해달라는 바르티매오의 요청에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네 눈을 뜨게 했다거나, 네 눈을 고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살렸다(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눈을 뜨게 되었으니 빌어먹지 않게 되어 굶어 죽을 걱정이 없어졌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 일어난 일은 단순히 바르티매오의 장애를 고친 일이 전부가 아닙니..
시므온송가, 구원 이야기 – 루가 2:22-40 오늘 복음은 예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위해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의 가족과 마주쳐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 시므온, 하나는 예언자 안나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예수를 ‘구원자’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시므온의 고백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가 22장 29~32절이 이 고백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시므온송가라고 부르며 성무일과 중 저녁과 밤기도에 독서 후 송가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시므온송가는 마리아송가, 즈가랴송가와 더불어 삼대송가로 꼽힙니다. 송가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고백하..
구원은 누구나 처음(마태 15,21-28) 혹 동료나 친구의 빈자리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심리적 공간이든 물리적 공간이든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그 사람이 없을 때 그 적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초조함을 넘어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함께 있어야 할 자리는 마땅히 그리 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매뉴얼과도 같습니다. 형식이나 법칙, 논리적 필연과도 비슷합니다. 규칙과 항상성에 따라 자리에 들고 나감은 나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더 갖게 만듭니다. 타자의 빈자리는 기실 나의 빈자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내 옆 빈자리에 있어야 할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죄는 강한 데서 싹트고 구원은 약한 데서 비롯됩니다! : 김대식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기장교회 보좌)
2022.10.21
죄는 강한 데서 싹트고 구원은 약한 데서 비롯됩니다!(요엘 2,23-3,5) 도대체 죄(Schuld)는 무엇일까요?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법학적으로 여러 학문적 개념으로 규명하려고 해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부정적인 마음과 행위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약하면 스스로에게 가해(加害)하지만 강하면 타자에게 위해(危害)를 가합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Geist; geist)과도 연관이 됩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을 때에 자신 안에 감춰진 또 다른 이름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약하기 때문에 안에 있는 부정적인 정신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힘과 정신을 주겠다고 합니다. 유약하다고 ..
회개의 증거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구원을 묻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증거로 행실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요한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곧 오실 그리스도와 종말의 때에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무척 알고 싶어한 것으로 보입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는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인간들이 불 속에 던져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걱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답변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말합니다. 늘 그렇지만 간단한 것이 실천은 어렵습니다. 특히 행실의 변화로 회개의 증거를 보인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 계약 공동체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 아들로 믿는 사람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이를 교회라고 합니다. 복음서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교회 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이 함께 가서 말하고, 그것도 듣지 않으면 교회차원에 권면하지만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며 출교시키고 접촉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신명기19:16~20 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18절에서는 교회에서 적절한 절차를 밟아 교인을 받아들이거나 출교시키는 것을 하늘에서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장입니..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귀신들린 이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며 많은 이들을 먹이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저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바로 ‘현재’ 내가 느끼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임을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구원과 행복이 기적 안에만 있는 것일까요? 비록 성경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고통에서 외로움에서 소외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지만 복음사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신기한 일들 자체가 아니라 구원과 행복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