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 루가 13:31-35. 이신효 스테파노 사제(부산주교좌교회)
2025.03.20
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 루가 13:31-35 ‘나’가 무너지는 경험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입니다. 마치 이것은 조그마한 퍼즐 조각으로 겨우겨우 완성된 그림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릴 때 느끼는 허망함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과거’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온갖 풍파에도 기어이 그리고 애써서 맞춰 놓은 나의 퍼즐 작품을 지키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진리’, ‘변함없음’, ‘선’, ‘정상’, ‘신념’으로 둔갑합니다. 아쉽지만, 이러한 생각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시간이 말해준 것을 ‘확신’하고 의존하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애써 지키고..
평화의 마을에 평화는 없고… - 마르13:1-8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강이 사해와 만나는 지점에서 지중해로 가는 이스라엘 중심부 산악에 위치한 도성 예루살렘은 오랜 기간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었다.가나안 여부스족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땅을 여호수아가 점령하고 다윗 이후 예루살렘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지만, 바빌론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느헤미아와 백성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재건하지만 ‘평화의 마을’ 에 세워진 성전은 여전히 이방인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고 경고하고 여인을 대놓고 차별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힘과 폭력, 차별이 당연시되는 성전’이 세워진다.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성전이라 불렸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엔 700명의 사제들..
최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 마르 10:2-16 우리는 종종 '적당히 하자'는 말을 사용합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족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혼 문제가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혼은 주로 여성에게 불리했습니다. 여성들은 경제활동에 제약이 많았고, 이혼한 여성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삶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종교적 권위에 기대어 이혼장을 요청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한 몸으로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예수님처럼 먹히는, 나누는 생명으로 신앙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도전을 받습니다. 신앙의 길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샘으로 가는 길, 그 길에는 수많은 유혹이 즐비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욕망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환경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선택하는 권리는 자유의지지만, 썩어 없어질 양식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살리는 양식을 선택하라는 복음 말씀은 우리 가슴을 두드립니다. 오늘 전례 독서는 탐욕을 양식으로 삼아 돈과 권력(우상)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말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참 신앙의 길을 걷기를 요청합니다. 그 길에서 먹을 양식은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이 항상 존재합니..
원초적 복음 - 사도 4:32-35 "인간의 무지함과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라는 중의적 정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부여됐습니다. 이것이 “원초적 복”음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것을 알리고 증언하는 자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 뒤에 자신들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교회 제도와 전통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고 그 권위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도화되기 이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 "원초적 복음" 뒤로 자신들을 가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해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사람들이 그 기적에 집중하거나, 사람인 제..
예수님의 뒤, 곧 나의 자리 – 마르 8:31-38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 가운데 무엇에 집중하게 됩니까? 내 안의 무엇이 그 말씀으로 향하게 하는지 곰곰이 나를 들여다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항의하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뒤로 물러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천천히 깊게 호흡하며, 성령께서 사람의 일에 끌려다니는 나를 예수님의 ‘뒤’로 인도하여 주시길 기다려 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뒤를 바라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은 깊은 고독이 뒤따르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이 길을 걸어 예수님의 뒤로 물러..
시므온송가, 구원 이야기 – 루가 2:22-40 오늘 복음은 예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위해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의 가족과 마주쳐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 시므온, 하나는 예언자 안나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예수를 ‘구원자’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시므온의 고백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가 22장 29~32절이 이 고백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시므온송가라고 부르며 성무일과 중 저녁과 밤기도에 독서 후 송가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시므온송가는 마리아송가, 즈가랴송가와 더불어 삼대송가로 꼽힙니다. 송가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고백하..
하느님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 오늘 복음 말씀은 세 파트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말씀처럼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와 결국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은 아들이 다 알고, 아버지께서 택하신 이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다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니,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예수님(당..
세상을 사랑한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 지금까지 저는 당신의 영감에 항상 귀를 막았으며, 당신의 계시를 무시하고, 당신께서 심판하신 것들과 정반대의 것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영원하신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전한 거룩한 교훈에 불순종하였고 세상과더불어 안주해 살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지만, 저는 “애통하는 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요, 위로를 받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넉넉한 재물을 가진 자와 명예를 누리는 자, 튼튼한 건강을 가진 자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러한 자들을 복받은자로 간주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 이 시간 저는 제가 지금까지 건강을 하나의 복으로 간주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