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루가3:15-17,21-22(박용성 바르나바 사제(서대구 교회))
2025.01.1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3:15-17,21-2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고귀하고 정결하고 값비싼 것이어서, 일상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한해 한번은 찾아가야 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순례 경비 또한 버거웠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번제물의 비용 또한 무거웠고, 만나서 하느님 말씀을 듣기에 제사장은 너무 먼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요르단강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나와 회개받을 수 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산과 계곡을 흘러 내려와 갈릴리 호수가 되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되어 흘러가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가고, 아이들은 수영을 하는 그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 요르단강 세례자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새로”, “다시”라는 단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거나 혹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실천은 오늘 말씀 말미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를 믿고 따르는 인간은 구원의 길로 가며, 이 여정 안에서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결국,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함께” 항상 새롭게 거듭날 것이며, 이를 통해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하나임을 드러낼 것을 생각해봅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일구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구원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일 수도 있..
예수님의 뒤, 곧 나의 자리 – 마르 8:31-38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 가운데 무엇에 집중하게 됩니까? 내 안의 무엇이 그 말씀으로 향하게 하는지 곰곰이 나를 들여다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항의하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뒤로 물러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천천히 깊게 호흡하며, 성령께서 사람의 일에 끌려다니는 나를 예수님의 ‘뒤’로 인도하여 주시길 기다려 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뒤를 바라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은 깊은 고독이 뒤따르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이 길을 걸어 예수님의 뒤로 물러..
권위 있는 새 교훈은 어디서 올까? - 마르 1:21-28 오늘 복음에는 사람들이 말씀의 권위에, 악령에서 해방되는 권위에 두 번씩 놀라고 있다. 선한 권위는 사람을 감화시키지만, 권위주의는 사람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한편은 굴종한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 들어온 율법 학자들의 가르치심은 인본주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고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신본주의 관점에서 율법을 친히 온전히 이루고 계셨기에 말씀의 권위가 드러나고 있다. 이는 말씀이 생명력으로 작동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생명의 빛이 되는 자녀의 삶을 누리고, 복음 전도자로 나아가려면, 하느님 말씀..
협조자 – “진리의 성령”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14: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본인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A⇒B로 이동합니다. 이는 공간의 이동이기도 하고 생각의 이동이기도 하고 생명의 이동이기도 합니다. A⇒B로 이동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길입니다. 어떻게 가야할지 고민하는 것이지요.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면 여러모로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제일 적합하고 편리한 길을 찾게 됩니다. 두 번째는 가야 할 목적과 명분과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중간에 어려움을 만나면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움직일 수 있는 힘, 즉 생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길과 목적이 분명해도 건강이 받..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는 사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갈릴리로부터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죄를 씻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독교의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예식입니다.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를 포함해서 세례는 죄를 회개했다는 증표로 주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은 세례가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교회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의 예식이 되는 세례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받으..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공동체로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은 광야생활의 성막(Tabernacle)이 발전된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처소였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빌론 침공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가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재건됩니다. 그후 헤롯 때에 이르러 본문에 나오는 화려한 성전으로 단장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화려한 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63년에 완공됐던 이 성전은 70년에 침공한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초토화되어진 채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보듯이 이스라엘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질은 하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이시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인간은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알 수도 이해도 설명도 할 수도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의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의 사랑을 경험한 후 성령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이 사신 삶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그들이 경험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선포하고 믿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신비를 신학적인 이해로부터 삶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대상과 사랑 그 자체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사랑과 사랑..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초래한 비극적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기는커녕 하느님보다 높아지려고 탑을 쌓았던 인간은 뒤섞인 언어로 인해 흩어짐이라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흩어짐으로 인해 인류는 소통하지 못하고 ‘나’와 ‘우리’만의 영역에 머물며 우상숭배와 전쟁과 같은 아픔을 계속해서 겪어야만 했습니다. 갈등, 비난, 혐오 등이 두터운 장벽이 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런 아픔을 말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흩어지고 상처받은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성령을 통해 저마다의 언어를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협조자 성령을 ..
요한복음서 14장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을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제자들과는 더 이상 육신으로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와도 같은 약속을 예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도 성령님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인도하시며 우리의 필요와 간구를 누구보다 더 상세히 알아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